◇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 토정(土姓)이라 하여, 다음 네 성을- 안(安) ․ 리(李) ․ 신(申) ․ 윤(尹). △ 촌성(村姓)이라 하여 한 성을-석(石). △ 내성(來姓)이라 하여 두 성을-김(金) ․ 정(鄭) △ 속성(續姓)이라 하여 세 성을-김(金) : I은 경주에서 오고, I은 광주에서 오다.
順興誌와 거의 같은 무렵에 편찬된 <輿地圖書>에는 安 ․ 申 ․ 李 ․ 尹 ․ 石 ․ 金 ․ 鄭 ․ 黃 ․ 權 ․ 朴 ․ 成 ․ 琴 ․ 洪 ․ 孫 ․ 郭 ․ 許 ․ 裵 ․ 余 ․ 柳 ․ 姜 ․ 全 ․ 張 ․ 南 ․ 宋 ․ 吳 ․ 丁 ․ 沈 ․ 邊 ․ 徐등 30여개 성이 본관은 새략된 채 올라 있고, 이보다 약 70년 뒤인 純祖말경에 편찬된 (邑誌)에는 위에서 보인 順興邑誌(一名 梓鄕誌)와 같으며, 1958년에 펴낸 興州誌에는 위네 보인 順興誌분에서 다음을 더 보태고 있다.
△ 김(金) : 김해 ․ 서흥 청도
△ 박(朴) : 순천 밀양
△ 리(李) : 花山 ․ 全義 ․ 덕수 평창 ․ 공주
△ 조(趙) : 함안 ․ 白川 ․ 고흥
△ 오(吳) : 해주
△ 문(文) : 남평 감천 △ 라(羅) : 나주
△ 민(閔) : 여흥
△ 구(具) : 능주
△ 진(晋) : 남원
△ 윤(尹) : 파평 △ 우(禹) : 단양
△ 강(康) : 信川
2. 순흥의 씨족(氏族) 분포
옛 순흥고을의 경역(境域)은 모두 13개 面에서, 1914년 고을이 폐지되면서 옛 읍치(邑治)를 포함, 부근 9개 면을 영풍군에(그때는 영주군에), 그 동편 4개편은 봉화군에 붙인 바 되었던 것이다.
한 고을의 유서를 고찰 정리하면서, 씨족 인물을 다룸에 있어, 옛 지경 전역을 범위로 해야 함은 필연이려니와, 하물며, 영풍이나 봉화 땅으로 귀속된 옛 순흥지역의 유림(儒林)이 지금도 여전히 순흥 향고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방자치조직으로 유서 깊은 순흥경로소 (敬老所)에 또한 옛 순흥府지경 전역이 오늘도 그대로 옛 순흥 고을 사람으로 참여해 오는 실정임에랴.
이제 옛 순흥의 씨족 분포를 살핌에 있어, 우선 편의상 영풍군에 귀속된 지역을「중심권」 으로 봉화군에 귀속된 지역을「외곽권」으로 나누어 보기로 하고, 이를 다시 각각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이기로 하다.
○ 중심권 (가) 옛 읍치권(邑治圈) : 지금 순흥지역으로, 옛 大平면 ․ 內竹면. (나) 단산권(丹山圈) : 지금 단산면 지역으로, 옛 일부석면(一浮石) ․ 동원(東園)면. (다) 부석권(浮石圈) : 지금 부석면 지역으로, 옛 도강면(道講) ․ 2부석면 ․ 3부석면. (라) 대룡산권(大龍山圈) : 지금 안정(安定)면 용산리(龍山里) ․ 여륵리(汝勒里) 지역으로 옛 대룡산면.
○ 외곽권 (가) 물야권(物野圈) : 지금 봉화군 몰야면 수식(水息) ․ 오록(五麓)지역으로, 옛 순흥府 수식면.
(나) 문단 ․ 도촌(文丹 ․ 都村)권 : 지금 봉화읍 문단 ․ 도촌 ․ 화천(花川)지역으로, 옛 순흥부 수민단(壽民丹)면 ․ 화천(花川)면 지역.
(다) 와란권(臥丹圈) : 지금 봉화 법전(法田)면 ․ 봉성(鳳城)면 동양(桐陽)리 지역으로, 옛 순흥부 와란(臥丹)면 지역이다.
옛 순흥고을을 대충 위와 같이 구분, 이제 각 지역별로 분포 世居해오는 씨족들을 들어보기로 하다 그런데, 여기에 들게되는 씨족은 대개 고을에서 양반가문으로 일컫던 사족(士族)들로, 그 밖의 성씨들은 마을을 이루어 사는 데가 별반 있지도 않은 듯하고, 혹 그 중에는 뿌리 깊은 집들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 해도 그 내력을 상고할 만한 자료를 얻기도 어려운 실정이기에, 부득이 사족에 편중하게 됨에 아쉬움을 갖게 된다.
1) 중심권
(1) 읍치권(邑治圈) 일찍 영남문화의 요람(搖籃)이요 선구(先驅)를 지을 만큼 찬연한 유서를 배경으로한 곳인지라, 순흥은 읍치를 중심으로, 부근에 이끼짙은 골기와집이 그들먹한 명문 세족(世族)들의 취락이 즐비하게 늘어 있음직도 하건만, 실지는 조금 다르다.
전국에서 꼽히는 大姓인 순흥 安씨의 본향(本鄕)이면서도 지금 순흥에서 안씨 문중마을을 찾아볼 수 없으니…. 읍치권에서는 다음 서너 마을을 들 수 있겠으나, 씨족마을이란 한갓 옛 말일뿐, 옛 주인이었던 씨족들은 겨우 몇 가구씩이 다른 성씨들과 섞여 살고 있거나, 아주 떠나버린 상태다.
○ 사현정(四賢井) : 순흥 安씨마을 : 읍내 동편 바로 죽계(竹溪) 냇물 건너에 자리한 마을 이다. 옛날 한때 크게 번성을 누렸던 安씨 마을로, 고려후기에 명현 四父子(安碩그 아들 軸(興寧 君, 시호 文貞公) 輔(시호文敬公) 輯(寶文閣提學 ,順興君)가 이 마을에 살아, 그들이 쓰던 우물을「四賢井」이라 했는데,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지금도 그 우물과 옛 비석이 있다). 지금 이 마을에 순흥 안씨는 두어 집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돌다리 전주 류(柳)씨 : 宣祖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류영경(柳永慶)이 한때 순흥에 살아,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할 자리를 망정동(忘情洞:지금 台庄부근)에 마련하기도 했었는데, 그 次子 흔(흔:宣武原從勳)의 자손이 돌다리(石橋里)에 世居. 小科(司馬:生員 進士) 4장에 大科(文科) 1장을 냈다. 지금엔 대여섯 집이 남아 있다.
○ 돌다리 안동 권(權)씨 : 宣祖때 참봉을 지낸 권순(權純:옛 順興誌에는 참봉으로 家乘 에는 府使역임)이 용궁(龍宮)에서 순흥에 옮겨 정착, 그 자손이 世居해 온다. 음사(蔭仕)- 文行의 선비가 있었다. 지금은 10집쯤이 살고 있다.
○ 西部 의성(義城) 金씨 : 조선 후기에 바래미(지금 봉화읍 해저리)에서 순흥에 옮겨, 進士 김희용(金熙鏞)이 비로소 돌다리에 정착. 大科 3장(文科 2장 武科 1장), 小科 7장에 여러 관직이 있었고 대대로 부명(富名)을 누리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떠나 있다.
(2) 단산권(丹山圈)
중-남부지역,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단산분지 너른 들판의 동 ․ 서 변두리 구릉(丘陵) 기슭에 뿌리깊은 여러 씨족마을들이 띄엄띄엄 깃들어 있다.
○ 병산(屛山) 창원 황(黃)씨 : 고려 공민왕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황승후(黃承厚)가 본향 창원에서 순흥 병산(지금 단산면 병산리)에 옮겨 터전을 열었다. 그 자손에서 小科 5장을 냈으며, 燕山君-中宗 무렵 司馬로 詩文에 능하고 행실이 높았던 황한충(黃漢忠)을 전후, 여러 인물이 있었다.
○ 바우(波回) 함창 金씨 : 속칭 바우마을의 함창 金씨는 조선 전기 中宗 무렵 장사랑 (將仕郞) 김사종(金嗣宗)이 터전을 열었다. 여기서 小科 2장, 大科 2장에 여러 관직- 文行을 냈다.
○ 뚜기(豆只:一名 茅溪리) 양천 허(許)씨 : 판관(判官)을 지낸 허윤공(許允恭)이 조선 초기 금성대군의 端宗復位운동을 돕고자 순흥부근에 지체하다가 뚜기에 숨어 정착, 함창 김씨마을인 바우마을의 서북편 야산자락에 깊숙이 감싸인 유벽한 동네 양천 허씨는 小科 몇장(옛 順興誌엔 2장, 그집 家乘엔 5장), 大科 1장에 여러 음사(蔭仕)와 문행을 냈다.
○ 새내(沙川) 달성 서(徐)씨 : 조선 초기 進士 서한정(徐翰廷)을 입향조(入鄕祖)로 한다. 世宗때 進士에 오른 서한정은 청운의 뜻을 품고 성균관(成均舘)에서 글을 읽다가, 端宗임금 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출세를 단념, 이곳에 낙향하여 등령(登瀛:새내 동편 건너마을)을 거쳐 새내에 터전을 열었다. 새내 달성 서씨는 小科 15장에 大科 3장(文科 2장 武科 1장), 많은 음사(蔭仕) ․ 文行의 선비를 냈다.
○ 동원(東園) 덕산 李씨 : 순흥 동원에 덕산(德山) 이씨가 살기는 고려 우왕때 文科로, 조선 초기 世宗때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지낸 이유(李?)에서 비롯된다.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이유(李?)는 진현관제학(進賢舘提學) 안영부(安永孚)의 사위로, 처가의 인연으로 이 고장에 옮겨 살게 된 것이다.
고려 이래로 화려한 가문으로, 순흥에 입향한 李?는 3형제가 나란히 文科에 올랐으며(李?만 이 순흥에 왔음), 李?의 아들 4형제, 손자 둘, 증손-현손까지 모두 大科 9장(그중 막내아우 師季의 4대는 순흥에 살지 않은 듯)을 냈고, 여러 음사(蔭仕)가 있어 조선 전기에 여러 인물 을 냈다.
○ 등령(登瀛) 안동 권(權)씨 : 등령(지금의 단산 동원리)의 안동 권씨는 조선 초기무렵에 백여 호의 동족마을이었다니 매우 오랜 가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世祖때 進士로, 효행으로 정려(旌閭)된 권득평(權得平)은 나라에 알려진 효자로, 그 사적이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도 전한다. 그 자손이 쇠잔하여 구두둘(九邱里)에 단 한집이 살고 있다 한다.
○ 단곡(丹谷) 현풍 곽(郭)씨 : 조선 중기 宣祖 무렵 단곡마을에 글 잘하고 행실 높은 선비 곽진(郭?:호 丹谷) 三父子가 울렸는데, 그 후손이 모두 떠났다.
○ 구두둘(九邱) 남양 홍(洪)씨 : 仁祖 무렵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시호介節 公)의 아들 윤(允)이 자리 잡아 살다. 小科 4장에 大科 1장을 냈으며, 음사(蔭仕) ․ 文行을 냈다. ○ 배나무실(단산면 九邱里) 풍산 홍(洪)씨 : 조선 후기 명공거경(名公 巨卿)을 무리로 낸 명족으로, 正祖 무렵 선비 홍유호(洪儒浩:일명 有漢)가 낙향 정착했다. 실학의 선구 성호 (星湖) 이익(李翼)의 문인으로, 동문 친구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그는 곧 교난(敎難)이 닥칠 것을 예견, 미리 화를 피하여 豊山을 거쳐 깊숙한 여기를 찾아 숨은 것이다. 그는 자손 에게 출세를 외면하고 안분 수신(安分修身)할 것을 가훈으로 했기에 여러 숨은 선비를 냈다. ○ 모산(帽山:지금 단산 옥대리) 경주 최(崔)씨 : 三代 효해응로 나라의 표창(旌閭)을 받은 경주 최씨는 조선 高宗초 무렵 함창(咸昌)에서 豊基를 거쳐 모산에 정착했다. ○ 五相(一名黑石) 파평 윤(尹)씨 : 端宗 임금의 충신 윤당(尹塘)의 후손으로, 조선후기 正祖무렵에 五相에 터전을 열었다고.
(3) 부석권(浮石圈)
부석면 지역에도 자연환경이 좋아, 뿌리 깊은 씨족들이 많다. 그 중에도 낙화암천(落花岩川)을 끼고 풍광이 아름다운 남부지역에 오랜 문중들이 집중되어 있다.
○ 두둘마(부석면 소천리) 경주 정(鄭)씨 : 宣祖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정탁(鄭琢:호: 藥圃 시호:貞簡)의 맏아들 유저(允著)가 처음 자리 잡았다. 大科 1장에 많은 小科 ․ 文行의 선비를 배출했다. 갓띠(冠後:부석면 북지리) 마을 ․ 소천리(韶川里)의 새두둘 ․ 봉래골 등에 世居한다. 순흥府 청주 정씨의 뿌리는 매우 오래다. 옛 順興誌 <수구(壽耈)>조에는 고려후기 정환(鄭환) 의 아내 韓씨가 98세를 누렸는데, 그 아들 해(해)가 충렬왕때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시호 章敬)였고, 순자 오(오)가 공민왕때 중대광(重大匡)四原白(시호 文克), 보(보)가 좌간의 (左諫議)에 지흥주사(知興州事)였다고, 文戟公 오(오)는 약포 탁(琢)의 7대조다.
○ 화가메(花감:부석면 용암리) 연안 김(金)씨 : 宣祖때 관상감(觀象監) 참봉을 지낸 金八國이 榮川 말바우(지금 이산면 斗岩)에서 옮겨오다.小科 2장에 여러 음사(蔭仕)를 냈다. ○ 용바우 전의(全義) 李씨
○ 도탄(桃灘:부석면 上石里) 선성 김(金)씨 : 孝宗때 군수를 지낸 金선이 榮川에서 옮겨 살다. 文行이 있었다.
○ 뿔바우 ․ 명암정(부석면 上石里) 경주 손(孫)씨 : 宣祖초에 進士 손흥경(孫興慶)이 골내 (지금 奉化花川)에서 옮겨 살다. 小科 4장에 大科(文科 2장 武科 1장)3장을 냈으며, 행실 도타 운 선비가 있었다.
○ 감실(부석면 감곡리) 우계(羽溪) 李씨 : 宣祖때 전적(典籍)을 지낸 학자 이여빈(李汝馪) 이 도촌(桃村:지금 봉화읍 都村)에서 옮겨 살다. 小 ․ 大科며, 여러 음사(蔭仕) 文行이 있었다.
○ 石南(一名城南) 안동 권(權)씨 : 조선 전기 中宗 무렵 선비 권기수(權期壽)가 安東 송파 (松坡:지금 西後면 校洞)에서 순흥 골내 밤나무실(지금 봉화 花川)을 거쳐 석남에 정착. 小科 3장에 文科 2장, 여러 음사(蔭仕)와 文行의 선비를 냈다.
○ 도봉(道峰) 야성(冶城) 宋씨 : 宣祖때 찰방(察訪)을 지낸 송함(宋涵)이 榮川에서 옮겨 자리잡았다. 文行의 선비들이 있었다.
○ 보계(寶溪) 여흥 민(閔)씨 : 조선 말기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민규식(閔圭植) 이 영남에 낙향, 순흥 수식(水息:지금 봉화 물야면)을 거쳐, 부석 광창(廣倉)에 정착했다.
○ 우수골(愚谷) 榮川 민(閔)씨 : 宣祖때 王子사부(師傅)를 지낸 민응기(閔應祺)가 살았다. 지금은 그 후손이 살지 않는다. 응기의 아버지 시원(蓍元)은 生員, 아들 흥업(興業)은 進士로찰방(察訪)이었다.
(4) 대룡산권(大龍山圈) 지금 안정면 용산리 ․ 여륵리 지역이다. 대룡산 순흥 安씨 : 조선 초기 端宗때 예천군수 안이(安理)가 단종임금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여기 터전을 열다. 小科 5장에 大科 4장(文科 武科)를 내고, 여러 음사(蔭仕) ․ 文行이 있었다.
○ 너르기(汝勒) 순흥 安씨 : 대룡산 남쪽마을. 安理의 현손 안선(安璇)이 처음 자리 잡았다. 小科 5장에 大科 1장을 내고, 약간의 음사(蔭仕) ․ 文行이 있었다.
○ 대룡산 창원 黃씨 : 宣祖 무렵 선비 황언주(黃彦柱)가 榮川 배고개에서 처가 마을인 대룡 산에 옮겨 살다. 배고개에서 文科 1장에 여러 음사(蔭仕) ․ 文行의 선비를 냈다.
2) 외곽권 옛 순흥의 동북부 지경으로, 1914년 순흥고을이 폐지되면서 봉화군에 편입된 지역.
○ 사제(沙提:지금 봉화 都村) 우계(羽溪) 李씨 : 우계 이씨가 처음 순흥에 살기는 고려 우왕때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요동정벌에도 참여, 공양왕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한 이억(李?)에서 비롯된다.
고려 진현관직제학(進賢舘直提學) 안영부(安永浮)의 사위인 이억이 고려 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고장인 순흥에 와서 회석(檜石:지금 단산면 옥대리)에 숨어 살 았다.
그 현손 수형(秀亨:文節公 金淡의 사위)이 약관으로 端宗때 평시서령(平市署令). 世祖의 왕위 찬탈에 비분하여 벼슬을 던지고 순흥 도지리(지금 沙堤)에 숨어, 世居의 터전이 되었다. 小科 9장에 大科 8장을 냈으며, 많은 음사(蔭仕) ․ 文行이 있었다.
○ 골내(花川) 무안(務安) 朴씨 : 宣祖때 文科로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낸 박선장(朴善長) 이 영해(寧海)에서 옮겨 정착. 小科 2장에 大科 4장을 냈으며, 여러 文行이 있었다.
○ 원두둘(院丘:지금 봉화 文丹) 남양 홍(洪)씨 : 宣祖때 進士 홍이성(洪以成)이 낙향 정착. 많은 과환(科宦)을 냈으며, 三學士의 한 분인 홍익한(洪翼漢) ․ 조선말 의병운동에 장렬히 순 국(殉國)한 洪思九의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 사암(蛇岩:지금 봉화) 선성 金씨 : 옛 수민단(壽民丹) 뱀바우(蛇岩)에 文節公 金淡의 자손 이 世居, 백암 김늑(金玏)도 여기서 생장했다. 옛 順興誌에 선성 金씨로 大-小科 출신의 많은 인물이 올라있다.
○ 띠띠물(지금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남양 洪씨 : 光海때 지조 높은 선비 홍우정(洪宇定) 이 낙향하여 숨어, 뿌리를 내리다. 그 자손에서 여러 과환(科宦)과 文行의 선비를 냈다. (옛 순흥 와란면)
○ 법전(法田) 진주 강씨 : 仁祖때 현감 강흡(姜恰)이 丙子호란의 굴욕에 비분하여 법전에 은거, 옛 순흥지에 진주 姜씨로 많은 인물이 올라있다.(법전은 옛 순흥 와란면(臥丹面)이다.)
○ 무짐(지금 물야면 水息) 평산 신(申)씨 : 中宗때 참봉 신공온(申公蘊)이 풍기 은풍에서 순흥 무짐에 옮겨 정착. 大科 2장에, 여러 음사(蔭仕) ․ 文行을 냈다.
○ 가구(可丘:지금 봉화 물야면) 창녕 성(成)씨 : 宣祖때 승지(承旨)를 지낸 성안의(成安義) 가 본향 창녕에서 순흥 가구에 옮겨 정착. 小科 12장에 大科 4장을 냈으며, 여러 음사(蔭仕) ․文行이 있었다.
○ 가구(可丘) 성주 배(裵)씨 : 宣祖때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배응경(裵應褧)이 본향 성주(星州)에서 榮川 보름골을 거쳐, 순흥 가구에 정착. 小科 5장에 大科 2장을 냈으며, 음사(蔭仕) ․ 일천(逸薦)에 文行의 선비들을 냈다.
○ 골내(花川) 평산 유(庾)씨 : 골내 동성촌(同聲村)에 조선초 무렵 크게 울린 평산 유씨. 고려말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유당(庾璫)의 아들 3형제가 나란히 文科에 올라, 함께 관찰사(觀察使) ․ 승지(承旨)를 지냄으로 하여, 마을이름이「同聲村」이었다고.
맏아들 유귀산(庾龜山)은 벼슬이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는데, 모두 금성대군의 端宗 복위운동에 참여, 멸문의 화를 입은 바 되었다.
4. 씨족 ․ 인물
위에서 보인 각 씨족들이 각기 이 고을 순흥에 입향(入鄕)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게 된 유래 와 각 씨족들에서 배출된 인물을 각각 문중별로 알아보기로 한다.